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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의 수재 신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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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7-03-23 16:18 조회1,93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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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설하고(김종원씨 일화)

1986년 미국으로 이민하기 바로 전이었다. 제산선생님을 모시고 수영정사에 있었을 때 일어났던 일이었다. 어느 날 부산 부전동에 있는 전통재래시장에 점포를 약 30개 이상 소유한 김종원씨 내외가 제산정사에 방문하여 사주를 보고는 부동산건물을 매입하고자 하는데 터가 어떤지 봐달라는 주문을 했던 것이다. 제산선생님이 나를 지적하며 예산선생이 다녀오시게 하는 것이었다. .

 

온 종일 사무실에 앉아 있다가 출장을 나가는 것은 한편 신나는 일이다. 두 내외와 함께 울산에 도착했는데 역시 울산지역도 난생 처음인지라 어디가 어딘지 당시는 몰랐으나 훗날 검증하기 위해 재방문했던 관계로 태화강 주변이었던 것이다.

 

현장에 도착해보니 오래된 여관이었다. 여관을 사서 뭣 하려느냐 하니까 경매로 싸게 나와서 여관을 사우나탕으로 변경해서 경영하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주변 지형을 살펴보고 나서 사우나탕이라면 물을 많이 쓰게 되는데 수돗물을 쓰려는가? 아니면 지하수를 쓸 것인가? 하고 물으니 당연이 수돗물로는 타산을 맞추기 어렵고 지하수를 개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하지마라! 단정적으로 말해주었다. 이곳 주변정황으로 볼 때 내년 7월이면 수맥이 끊어질 것이니 지하수를 사용할 수 없게 될 것이라고 했다. 이유인즉 출입구 바로 옆에 6차선 자동차도로가 있는데 여관입구에 공터가 있는지라 아무래도 내년 여름이면 공터에 세차장이 들어설 것이기 때문에 수질오염은 물론이거니와 지하수 고갈문제도 올 것이라고 하여 일단 계약을 포기하고 발길을 돌렸는데 다음해 미련이 남아 현장에 가보았더니 실로 대형세차장이 생겼던 것이다. 이는 나도 궁금해서 개인적으로 가봤고 김종원씨 부인도 단독으로 현장을 다녀왔다고 했다.

 

돌아오는 길에 범어사입구 청룡동에 나대지가 있는데 약 80여평으로 기억된다. 매입했는데 여기다 무엇을 해야 좋겠냐는 것이었다. 아마도 이 땅은 내가 신이 들리지 않고는 그렇게 통변하기 어려웠다고 생각되는 곳인데, 이 땅은 개인집이나 상가로는 부적합하고 교회나 포교당 병원이 들어설 자리라고 말해주었다. 김사장은 그곳에 상가건물을 지으려고 마음먹고 매입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단 건축을 미루고 나대지 상태로 양도자를 찾아보라고 했던 것인데 다음해에 범어사 주지가 사찰부지를 팔아먹었다고 온통 신문방송에서 떠들어 댔던 것이다. 결국은 범어사에서 원인무효소송을 제기하여 승소하므로 종내는 범어사로 귀속조치됐던 일이 있었다. 이때도 내가 부산에 내려와 청룡동을 처음 가봤던 지점이다.

 

 

그런 일이 있자 부동산을 매입할 때마다 나에게 묻지 않으면 안 될 입장이 되고 만 것이다. 소위 풍수지리의 마법에 걸려들었던 것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매각하는 것은 마음대로 했지만 건물이나 땅을 살 때는 꼭 나에게 묻곤 했는데 몇 해 지나서 초읍동에 저택이 나왔다며 다시 봐달라는 것이었다. 집을 둘러보니 고택으로 당시 5억 원이나 호가했으니 대지도 넓고 이층양옥에 정원조경도 수억 원이 들었을 만큼 대궐이었다.

 

돈 있고 부족한게 없는 부자가 이런 집에 살아보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이었을 것이다. 당시엔 그 집에 아무도 살지 않고 비어있었는데 주변을 살펴보았더니 재벌이 소실에게 증여했던 것으로 판정을 내렸다. 주인이 아닌 소실이나 기생에게 증여한 집이 맞는다면 당신네 부부는 이집으로 이사오면 가운이 기울게 될 것이라고 말해주고 사지 말라고 당부까지 했다.

 

그리고는 내가 미국으로 갔던 것으로 기억된다. 다음해 신수철에 양정사랑방으로 와있었는데 김사장 내외가 방문하여 결국 그 집을 매입해서 입주까지 마쳤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아플싸 이미 때는 늦었다. 그렇다고 내가 판정한 그 대로 가운이 기울어 이별까지야 하겠나 하고 나도 관망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이왕지사 입주한 것을 다시 이사하고 매각하라고는 차마 할 수가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 일이 있고 나서 아마도 2년의 세월이 흐른 것으로 짐작된다. 그 집을 사기 위해 부전동 재래시장에 있던 점포 30여개를 모두 팔고 여유자금이 있는지라 중앙동에 고층빌딩을 은행론을 얻어 매입하게 되었는데 그때는 물론 내가 미국에 있었긴 하지만 연락도 없이 저질러 놓고 자랑삼아 나에게 이야기 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속으로는 결국 망할 짓을 하고야 말았구나 하고 말았는데 아니나 다를까 빌딩에 입주한 세입자들이 세를 내지 않고 무슨 일인지 몰라도 송사가 생겼던 것이다. 그로 인해 전 재산을 모두 망해버리고 집 한 칸 없이 부부간에 이별하고 자취를 감췄더니 몇 년이 지나 만나게 되었는데 부인은 대구에서 보험회사를 다니며 생계를 이끌어 가고 있었던 소설 같은 이야기다. 지금도 그 부인은 대야농장에 자주 연락하고 있지만 버스 떠난 뒤에 손을 들어본들 무슨 소용이겠는가? 그런 부자도 한순간에 추락할 수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지만 아무튼 하지 말라는 짓을 해서는 안 된다는 계언이다.

 

아마도 초읍동 주택보다 중앙동 빌딩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되지만 초읍저택을 사는 바람에 재래시장에 황금싸라기 같은 점포를 모두 팔게 되어 그로인해 패망의 길이 시작되었으니 초읍 저택이 문제였던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겠다. 점포세만 해도 배 두드리며 평생 편히 살 수 있는 수입이었다고 한다.

 

이렇듯 양택이든 음택이든 풍수에 관해 한동안 투시안을 열었던 관계로 신출귀몰하는 판단을 했던 때가 있었으니 웬만한 분들은 나에게 의뢰하지 못할 정도로 거리감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 당시엔 음택을 봐주는데 2천만 원의 복채를 준비해야 했으며 양택의 경우는 3~5백만 원을 준비해야 했었다. 그런데 이상한 현상도 경험하게 되었는데 복채를 정해놓고 좀 비싸서 그런지 아까워서 그런지 어느 분은 절반만 내놓기도 하였는데 전액을 다 내 놓은 분은 사업도 번창했고 지금까지도 가운이 번성하는데 반해 복채를 임의로 할인? 한 분들은 그 후에도 가운이 불발하여 한 동안 고전하는 것을 경험하게 된 일도 있었다.

 

풍수에 관한 이야기는 수도 없이 많지만 여기서 줄일까 한다. 부산에 살다가 지금은 울산으로 이주한 김사장은 대한민국에서 땅을 보는 데는 차예산 선생만한 분이 없노라고 십 수 년간 선전부장을 자임하기도 했다.

 

경남 하동군 양보면 우복리 일대를 비롯하여 청암면인가 하는 지역으로 부터 청학동까지 그 지역분들의 의뢰를 받아 수 없이 답산했고 배꼽을 움켜쥐고 웃기도 하는 통변이 속출하기도 했던 시기가 있었다.

 

1993년 신년초에 동래구 온천동으로 사무실을 이전했다. 이곳에서 2006년 대야농장으로 귀농하는 동안 만 13년간 상당실을 운영하면서 수많은 일화가 있었으니 중요한 통변만을 간추려 소개할까 한다. 이는 내 자랑이 아니요 학문을 연구하는 분들에게 조금이나마 통변의 묘미를 전해주기 위함이니 숙지하기 바라는 마음이다.

 

 

1화 통변의 묘.

1987년 가을 입시철을 앞두고 진학상담으로 바쁘던 시기다. 이때는 미국에서 귀국하여 임시로 거제동에 있는 40평짜리 빌라에서 상담을 했는데 하루에 보통 30~40명의 문객이 몰려들 무렵이었다.

하루는 전국 2등 부산경남지역에서 1등을 한다는 수재의 모친이 방문했는데 당시 방안에는 약 30명의 문객이 대기중이었을 때였다.

 

戊己壬己

辰巳申酉

위 명조의 모친이었다. 사주로 봐도 수재임에는 틀림이 없다. 사주전체가 재주로 똘똘 뭉쳐셔 있어 수재라는 것이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감명기록지에 명조를 써놓고 일필휘지하는데 재주는 천하를 덮을 만 하고 天醫가 전공이니 서울의대를 원하겠구나 그러나 서울대학에 인연이 없으니 연대의대로 진학을 하거라. 그러나 자신의 재주만 믿고 서울대를 고집하다가 종내는 4수하다가 실패하고 인제의대로 진학하게 되리라. 하고 기록해주는데 그 모친을 따라 왔던 문객들이 웅성웅성 대는 것이었다. 전국에서 2등을 한 수재가 서울대를 못가면 누가 가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팔자를 봐줄 뿐 개인의 사정을 보는 것이 아니라고 했는데 그 모친이 감명지를 달라고 하며 절반만 봤으니 1만원만 내겠다고 만원 짜리를 놓고는 감명지를 그 자리에서 찢어버리고는 기분나쁘다는 표정으로 나가는게 아닌가. 이때는 상담료를 2만원 받을 때였다.

 

정말로 인생 상담을 하면서 이때같이 황당한 일을 겪어보기는 처음이었다. 그 자리에서 더 이상 무슨 말을 하겠는가. 나도 덩달아 일어나며 방안에 꽉 차있던 문객들을 돌려보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 공부가 부족해서 그런지 모르므로 입산하여 공부 좀 더하고 오겠다고 말하고는 가방을 챙겨서 미국으로 가려다가 지리산으로 들어가 진학결과가 나올 때까지 연구에 몰두하고 있었는데 그해 12월 하순경인가 합격생 발표가 나왔던 것이었다.

 

제일 먼저 이동준이란 이름을 확인하려 했는데 하산하지 않으면 수단이 없었는지라 를 열어 을 해보니 不合格이 되었다는 느낌이 왔던 것이다. 결과는 나왔으니 다시 사무실로 내려오려는데 벌써 학부모들 사이에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서 나를 아는 부인이 내가 머무는 지리산까지 데리러 왔던 것이다. 이때 지리산에 수련차 자주 들리던 곳이 있었는지라 나를 잘 아는 이웃이 여러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입시상담은 물 건너갔고 신년 신수를 보고는 渡美했다가 여름방학이 지나고 귀국하게 되어 다시 상담실을 운영하게 되었는데 당시 고등학생이 있는 부인들 사이에 내 소문이 퍼졌는지라 문객이 두 배 세배로 늘어나 하루에 50~60명씩 몰려들어서 바쁜 한 겨울을 보내게 되었다. 방안이 비좁고 밖은 춥고 하니 어떤 분은 대기순서를 자기들끼리 정해놓고 차에 가서 앉아 있다가 들어오기도 했고 어떤 분들은 화장실까지 들어차 있을 정도였다. 그래도 대필서기를 고용하지 않고 혼자서 모든 업무를 처리했던 것이다. 이때 최고로 많은 감명을 한 것이 50명이 넘을 때도 있었다. 아침 6시부터 밤 10시가 되도록 지키고 앉아 봐달라며 내 사정은 조금도 생각지 않았던 것이다.

 

위 학생은 부모의 뜻인지 본인의 뜻인지를 모르지만 하여간 오기로 결국 4수까지 도전했으나 서울의대로 진학을 못하고 군 입대 때문에 하는 수 없이 늦게 인제의대로 진학하여 전액 장학생으로 神童이란 소문이 날 정도로 우수하게 공부하여 지금은 아래와 같은 직책을 가지고 지낸다.

 

戊己壬己 대신동 거주.

辰巳申酉

 

◈◈프로필: 이동준 인제의대 교수(인제대 일산백병원 신경외과)가 최근 열린 제10차 대한방사선수술학회 정기학술대회 및 정기총회에서 제11대 회장으로 선출됐다. 임기는 1.대한방사선수술학회는 방사선수술과 관련된 신경외과·방사선종양학과·의학물리 등 전문가들의 학술단체. 방사선수술에 관한 최신지견을 공유하고, 국내 방사선수술 발전을 위해 20042월 창립됐다.◈◈

 

이런 일이 있고 나서 동준이 모친은 나를 볼 면목이 없는지라 오늘날까지 한번도 만나지는 못했지만 그 후로 진학생 문제로 고민하는 사람에게는 난곡 차예산 선생을 찾아뵈라고 20년을 선전하기에 이르러 마음의 빚을 모두 갚은 분이다. 아마도 내가 부산에 있었다면 지금도 손님을 보낼 것인데 귀농하고 난 후로는 소식이 끊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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