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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修行의 길] 霽山門中 入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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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2-02-15 16:47 조회1,30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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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修行의 길]霽山門中에 入門하다.

 

 

신비스러운 통변이 수도 없이 전개되었고 역사의 인물로 비롯하여 이승만 박정희 조병옥 전두환 노태우 김종필 윤필용 이후락 김대중 등은 물론이려니와 이성계 조광조 율곡선생 등 저명했던 인사 및 경제계 거물의 명조를 연구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저명인사와 역사의 인물을 연구하게 된 것은 그릇을 평가하는 기준을 익히는 과정이었다. 세상 사람들이 아는 유명한 사람은 그릇이 다르다는 것이다.

 

 

傷官格은 절대로 대통령에 당선될 수 없다는 이치도 선생님께 배운 것이다. 그런데 장개석의 명조는 화토상관격인지라 이에 대하여 반론을 제기하자 심하게 화를 내시면서 스스로 터득하라는 것이었다. 이때 처음으로 화를 내시는 모습을 보게 되었으니 어려워서 함부로 질문을 드리지 못했던 것도 사실이다.

 

 

註解:후일 많은 역사인물의 명조를 가지고 연구해본 결과 국가체제를 전복하는 혁명가라야만 왕이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장개석, 주원장 등 체제전복과 더불어 통치자가 된 분들이다.

 

 

고로 丙寅年에 학술토론으로 갑론을박에 들어갈 때 까지는 잦은 질문을 드리지 않고 내가 연구하고 스스로 깨닫는 길을 택하게 되었던 것인데 어쩌면 질문하지 않고 연구한 것이 효과적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선생님께서도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셨던 것이 아닌가 한다.

 

 

왜냐면 선생님께 배운 이론을 항상 흉내만 내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터득하여 물리를 얻은 것은 영원한 내것이기 때문이며 선생님과 다른 이론이 계발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선생님보다 월등한 이론과 지름길을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라는 점을 후일에야 깨닫게 되었고 선생님의 인정을 받으며 계승후학으로서 인정을 받게 되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럭저럭 물리가 터질 듯 말 듯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 통변숙달에 선생님도 흐믓해 하셨던 것이 사실이다. 핵심은 지도를 받았고 세부적인 통변은 언제나 나의 몫이었으나 대체로 선생님의 생각으로는 흡족하리만치 빠른 진전을 보였던 것이다.

 

 

박장열군에게 들었던 전두환씨의 명조에 대하여 질문드린적이 있었다. 어떻게 전두환씨가 12.12사태 이후에 대통령이 될 것을 아시게 되었는지 매우 궁금학 생각됐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명쾌하고도 신묘한 통변의 이치를 새로이 깨닫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무엇이던 모르면 궁금하고 어려워 보이지만 알고 보면 싱거운 것이다.

 

 

해답은 暗神활용과 時上正官과 戊癸合의 이치속에 숨어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이와 같은 통변은 아무곳에서나 들어보기 어려운 이치였다고 회고한다. 12.12사태는 비밀리에 공작을 한 것이니 명조에서도 나타난 곳에서 찾기 어렵고 비밀리에 숨어있는 조화를 알아야 원인을 찾을 수 있다 하셨다.

 

 

이 말씀을 깊이 간직하며 연구하다가 탈세나 위법 밀수 마약밀매 불법수단의 탈선 쿠데타 음모 등이 모두 비밀리에 발생하는 것이라면 암신에서 찾아야 한다는 이치를 깨닫게 되었던 중요한 난명학의 핵심이 되었던 것이다. 즉 그 사람의 겉모습과 속마음의 차이점이라 할 수 있는 통변의 묘리라 하겠다. 도둑도 숨어다니는 직업이라면 당연히 암신속에 허욕이 붙어있기 때문이다.

 

 

藏神은 감추어져 있는 것이니 만큼 나타나지 않는 비밀이며 露神은 세상 사람에게 들어내는 것이니 숨길 수 없는 것이라 인생사 명리의 치이와 추호도 다를바 없는 진리인 것이다. 이런 말은 어느 서적에서도 지적하지 못했고 가르치는 곳도 없기에 혹시라도 이론을 알았다 할지라도 암신의 활용법과 암신이 어디에 숨어있는지를 찾지 못한다면 아무런 가치가 없는 허론이 되고 말 것이다.

 

 

이러한 이치를 스스로 깨닫기에는 아주 쉬운 이론 같으면서도 어려운 일이다. 그러므로 평생을 독학해도 깨닫지 못한다는 이치를 알게 되었다. 사소한 이론인 것 같을지라도 문중수학의 중요성을 대변해주는 대목이라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저명인사 등 상담하면서 검증되었던 이론을 이 자리에 다 소개할 수는 없고 학술적인 많은 이론과 깨달음의 초석이 될 만한 자료를 소개하였으므로 명리를 연구하는 후인은 이를 근거로 하여 깨달음의 길잡이가 되지 않겠나 믿어 의심치 않는 바이다.

 

 

열 가지를 가르치면 혼란스러운 법이다. 길잡이만 해주고 스스로 걸어갈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 천리만리 길이 힘들지 않는 법이다.

 

 

전문술어가 되어 명리의 이치를 모르는 분들은 흥미가 없을 것 같아 조금 재미있는 이야기를 사실에 입각하여 소개할 생각이다. 제산선생님을 만나서 입문하기 전에 나는 도대체 어디서 무슨공부를 했으며 어떠한 깨달음의 수행을 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아무곳에서도 밝히지 않았으나 이 자리에 일부나마 소개하려 한다.

 

 

◆1973년 겨울부터 자유로운 몸이 아니었다. 취업도 어려웠고 그렇다고 장사군도 못되는 성품인지라 이때부터 30대를 완전히 은둔생활을 하며 道門을 알게 됐다고 할 수 있다. 주로 용문산과 오대산을 왕래하며 수도자를 만나보며 참선이라기보다 은둔생활에 매료되어 수행을 했다. 깊은 산속에 반경 1km를 마음의 제한구역으로 삼아 금줄을 쳐놓고 벗어나지 않고 얼마나 견딜 수 있는가 하는 근기를 기르며 무상무념의 세월을 살아봤다.

 

 

언젠가는 먹을게 없어서 하늘에 우러러 탄식하며 내가 이곳에서 굶어죽어야 하는가! 아니면 먹거리를 구하러 下山해야 하는가? 그야말로 天地神明이 계시다면 오늘 밤 꿈에라도 해답을 달라고 간청하고는 별빛이 쏟아지는 하늘을 이불삼아 잠자리에 들었던 일이 있었다. 먼동이 트면서 잠에서 깨어나 평소처럼 옹달샘에 가서 물한 모금 떠마시고 심호흡을 하고 났지만 배고픈 줄도 모르고 왠지 기분이 상쾌했는데 하산하고픈 생각을 망각한 듯 오늘도 내일도 이곳에서 살 것처럼 나무부스러기들을 긁어모아 모닥불 피울 준비를 하는데, 햇살이 중천에 비칠 무렵 어느 노파가 머리에 밀가루포대에 무엇인가를 담아서 머리에 이고는 내가 있는 곳으로 오는 것이었다.

 

 

말없이 물끄럼이 바라보니 노파왈 “여보시오, 젊은이 이곳에 도사님이 어디 계신가요?” 하는 것이었다. 느닷없이 도사를 찾는 바람에 순간 당황했지만 무엇을 잘못알고 찾아온 분이라고 생각하며 ‘내가 이곳에서 벌써 1년이나 지냈는데 그런분은 보지 못했습니다.’ 하며 반문했다. '무슨일로 도사님을 찾는지요?‘ 하자 노파의 말이 신비롭게 느껴졌다.

 

 

어젯밤 꿈속에서 산신할아버지가 나타나서 이곳에 올라가면 수도하는 도인이 있는데 먹을것좀 가져다주라고 하더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쌀 두어되를 자루에 담아서 머리에 이고는 찾아왔던 것이다. 그러시다면 내가 여기서 오래동안 지내느라 먹을게 떨어져 굶고 있으니 나를 주고 가시라고 하니 아무런 의심이나 반응이 없이 선듯 내려놓는 것이었다.

 

 

그 쌀을 고맙다며 받아드는 순간 신기한 현상이 나타났던 것이다. 평생 처음으로 신들린 사람들이 이런것이로구나 할 정도로 그 할머니의 가정사가 영화의 한 장면같이 뇌리를 스치는데 가정에 우환이 깊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할머니 혹시 큰 아드님이 병환으로 고생하고 계신지요?’ 하자 할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내 앞으로 바짝 다가와 팔을 붙잡고는 하소연하듯 어떻게 우리 아들 좀 낫게 해 줄 수 없느냐며, 목숨이라도 살려 달라는 애원을 하는 것이었다.

 

 

결국엔 이분의 아들을 병석에서 일어나게 한 사연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은둔생활을 접어야 했으니 마장이었던 것이다. 서울 삼양동 달동네 마을에 살고 있으며 직장을 다니다가 무단히 좌골신경통이 심하여 재래식 화장실에도 못갈 정도로 불편해졌던 것인데 병원에 다녀도 효험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때 天地自然의 氣가 얼만큼 위대한가를 첫 경험하게 된 일화를 낳게 되었던 것이다.

 

 

은둔에 들기 전, 오대산과 계룡산 참선방 등 여러곳을 찾아다녔으나 젊은 스님들이 할 일없이 가부좌하고 앉아 참선수행을 했다고 해서 큰 달인이나 도인이 탄생한 것도 아니고 가시적으로 이룬 것이 보이지 않으니 허송세월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의구심이 생겼던 것으로 나는 그런 방식의 참선보다는 나름대로의 수행방법을 찾았던 것이니 이때부터 대자연의 정기를 붓 끝에 심어보겠다는 결심으로 사경을 시작했던 것이다.

 

 

사경을 결심하게 된 배경으로는 남사고에 등장하는 모 도인이 龍그림에다가 눈을 그려 넣자 용이 살아 꿈틀거렸다는 설화가 있는지라 사경으로도 얼마든지 득도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할머니에게 그동안 사경해 두었던 반야심경 한폭을 드리며 그때 떠오르는 묘책을 가르쳐 주며 아들에게 다녀오라고 일렀다. 3개월이면 훌훌 털고 일어날 것이니 걱정말라고 위로해 보냈는데, 이무슨 날벼락인가? 말대로 그 아들이 병석에서 일어나 건강을 회복했다고 삼양동바닥에 소문이 나자 낯모르는 사람들이 나를 만나기를 원하여 구름떼같이 모여들었으니 이때부터 마장이 되어 자리를 털고 일어나야 했다.

 

 

그에 앞서 아랫마을에 어느집 30대 초반의 새댁이 위암에 걸려 다 죽게생겼는데 서울대학병원에서 치유불가하다는 판정을 받고는 죽음을 맞이하러 집으로 돌아왔다는 소문을 듣고는 산에서 자생하는 모종의 식물을(이 식물이름은 밝힐 수 없음) 채취해서 한다발 갖다 주고는 큰 가마솥에 푹 삶아서 물대신 자주 먹여보라고 했던 일화가 있었다.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이 무엇인들 못하겠는가? 어차피 죽을 목숨이라면 도인이 주는 영약?이나 먹고 죽자는 마음으로 한드럼이나 되는 약초다린 물을 마셨다는 것이다.

 

 

살았을까? 죽었을까? 실로 궁금하기 짝이 없었지만 산에서 그 집까지 내려오려면 마음의 방어선을 넘어야 했기에 참고 있었는데 나중에 알아본 결과...거짓말같이 병이 나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서울대학병원에 다시 검사를 받았는데 담당했던 의사가 기절할번 했다고 했다. 그렇다면 오진이었을까? 아니면 내가 준 약초 효험이었을까?

 

 

그래서 혹시라도 이 풀이 위암을 치유할 수 있는 약이라면 요즘말로 대박이 눈앞에 와 있는 듯 했다. 당시 내 사촌형님의 딸이 이대 약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 약대 대학원에 재학중이어서 시료를 보내 분석해 본 결과 암 치료에 아무런 성분도 없다는 통보를 받게 되었다.

 

 

믿기지 않아 재차 성분검사를 의뢰했지만 역시 답변은 똑 같았다. 그렇다면 이 환자는 어떻게 된 것이냐? 하는 문제로 많은 논란이 벌어지기도 했다. 도력의 힘으로 나은 것인지 약초덕에 나은 것인지 모를 일이나 아무튼 죽음이 임박했다는 강박관념에 빠져있던 환자에게 산중도인이 영양초를 구해 준 것이니 이것만 열심히 먹으면 병이 나을 것이라는 심리적 치유효과가 있었던 것은 아닌지 아직도 의문은 풀리지 않고 있다.

 

 

그 당시 산 정상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중, 어느 할아버지가 샛길로 황급히 달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이는 필시 집안에 무슨 급한 일이 생긴 모양이로구나 하고 생각하며 노인을 불렀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아파 약 지으러 가시나요? 하니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다는 것이었다. 그러면 좋은 길로 가셔야지 샛길로 가다가는 약을 못져옵니다. 넘어져서 다리가 부러질 것이니 내 말대로 조금 돌더라도 좋은 길로 가시라고 거듭 말해주었지만 평소에 자주 다니던 길인지라 익숙해서인지 듣지 않았는데 나중에 듣자하니 역시 다리가 부러져 약은 아는 사람 통해서 지어 보내고 자기는 병원에 입원했다는 것이었다.

 

 

한번은 영등포에 사는 친척이 하숙집을 운영하는데 부인이 좌골신경통에다가 신경쇠약으로 인해 밤잠을 이루지 못한지가 10년이나 되어 이제는 폐인이 됐다며 한탄하는 것이었다. 이런말을 전하면 속 모르는 분들은 나를 신들린 박수무당이라고 할는지 모르지만 내가 경험했던 일화이므로 재미로 읽어주기 바란다.

 

 

그래서 역시 경면주사로 사경한 반야심경을 한폭 주면서 잠자는 머리맏에 걸어놓으라고 일렀는데 그러기를 한 열흘쯤 지났는데 밤이면 꿈속에 관세음보살이 글속에서 나와 아픈 곳을 쓰다듬어 주더라는 것이 아닌가. 이런 일이 있은 후 건강을 회복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런데 묘한 것은 삼양동 아들이라는 사람은 戊子生(1948년)이었는데 위암환자도 무자생이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사실은 신경병 환자역시 무자생이었으니 무슨연고인지는 신명의 세계를 다녀오지 않은 사람은 이해가 어려울 것이다.

 

 

실로 나와 인연이 맺어진 환자들은 병원에서 치유가 불가하다고 판단되어 무당집을 드나들며 굿을 여러번씩 했던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무당들에게 나의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던 것이니 결국 신촌 사무실이란 곳은 무당들이 독채전세를 얻어서 나를 머물도록 했던 것이다. 이곳에서 제산선생님을 만나게 되어 그 자리를 석달 만에 돌려주고 나오게 됐던 일화였다.

 

 

아마 아랫글 중에 중복되는 이야기일는지 모르지만 서울에 살던 덕화선녀라는 여성도인이 있었다. 지금은 경기도 안성시 삼죽면으로 20년전 이주를 했다고 하는데 여러 각도로 찾으려 했으나 아직 만나지 못하고 있다. 시간이 나면 다음 달 쯤이라도 삼죽면을 샅샅이 뒤저서라도 덕화선녀를 만나보고 싶은 생각이다. 이 분은 나보다 한 살 적은 여성인데 서울 종로구 공평동에서 태어나 7세때 동란을 만나 조실부모하고는 고모댁에 의지하다가 소녀시절에 어느 신부님의 안내로 수녀가 되기로 하고 聖女의 생활이 시작됐던 분이다.

 

 

28세 되던 해, 느닷없이 천주교리가 마음에 와 닿지 않던 중 지금은 고인이 됐지만 도봉산에 김영식도인을 알게 되었는데 그때 덕화선녀는 정릉성당에 있었는지라 도봉산과 가까운 거리였으므로 우연히 만난 것이다.

 

 

도인의 도담을 몇마디 듣다보니 이길이야 말로 내가 가야할 길이구나 하는 마음이 생겨 수녀복을 벗어버리고 입산수행의 길을 떠난 것이다. 나이 28세의 아릿따운 꽃띠여성이 도인이 되겠다고 참선방에 결가부좌하고 수행을 한다는 것은 요즘세상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대인의 행동은 범인이 이해할 수 없는 그런 속내가 있다는 것을 이해하면 될 것이다.

 

 

김도인을 만나 도봉산으로 치악산으로 월악산으로 계룡산 지리산 태백산 안 다닌데가 없을 정도로 산행을 하며 자연의 기에 심취하며 공부하기를 만 3년이 지난 어느날, 신명이 임하기 시작했는데 어느정도냐면, 내일 아침에 사대일간지에 특종기사가 실릴 것을 저녁에 미리 노트에 적어놓으면 꼭 그런 기사가 올라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느 마을을 지나면서 바라보면 며칠내로 저 동네에 초상이 나겠구나 하면 그대로 되더라는 것이니 자신도 놀랍지만 누가 들으면 어찌 믿으려 하겠는가? 그리고 당시 수원에 사는 동생한테 편지를 써서 보내놓고 어떤 모습으로 받는지를 미리 알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동생한테 전화로 어떻게 생긴 우체부가 편지를 가져왔는데 너는 잠옷바람에 편지를 받더구나 하면 그렇다는 것이니 이정도면 신이 들려도 선무당 사람잡을 만큼 들렸던 것이다.

 

 

그러나 덕화선녀의 심성은 굶어죽었으면 차라리 죽을 사람이지 돈받고 예언을 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분의 행적은 서울 미아리 대지극장 뒤편에 있는 파출소 근무하던 분들이면 소문들어 모두 아는 사실이다.

 

 

그러던 어느날 평소와 같이 참선을 하는데 갑자기 앞날이 걱정되더라는 것이었다. 지금은 이대로 초근목피하며 연명할 수 있지만 나이들어 먹고살아갈 대안을 마련하지 않는다면 종내는 먹고살기 위해 점장이가 되어야 할 판이니 안되겠다고 생각되어 돈 벌궁리를 했는데...

 

 

당시 노기남대주교님과 김철규신부님을 모셨던 관계로 아마도 김철규신부님에게 장사할 자금을 부탁한 것으로 알고 있다. 두분 모두 작고하셨는데 덕화선녀의 인연으로 두분을 내가 만나 인사도 나눈 일이 있었다.

 

 

지금은 폐쇠됐지만 명동에 코스모스 백화점이 있을 때였다. 3층에 선물용코너 1평짜리를 얻어서 일본관광객 상대로 선물장사를 했는데, 거짓말 같은 기적이 일어났던 것이다. 아마도 그 당시에 백화점에 있던 분들이라면 알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1층에는 큰 규모의 똑같은 선물용 코너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3층 비좁은 가게로 사람이 몰려들어 직원이 세명인가 점심도 거르며 팔아댔다고 하니 돈을 얼마나 벌었는지는 모르지만 하여간 당시에 꽤나 큰 집을 한 채 마련하고 평생 수행이나 하며 먹고 살아갈 재산을 모았다고 하니 놀랍지 않은가?

 

 

한창 장사가 잘 되었지만 덕화선녀가 목표한 재물이 모였으므로 더 이상 욕심부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되어 가게를 내 놓았는데 권리금이 엄청 비쌌다고 하니 많이 받았던 모양이다. 아마도 1978년도 인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비싼 권리금을 받고 판 가게가 백화점 부도로 폐쇄되고 말았으니 사서 들어온 사람이 쫄딱 망하게 된 것을 안 덕화선녀는 양심상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하고는 백화점 문 닫는다는 보도를 보는 즉시 달려가서 그 사람을 위로했는데...

 

 

말로만 위로해서 될 일은 아니다. 먹고 살자고 없는 돈 있는 돈 긁어모아 장사를 시작하자마자 망하게 생겼으니...덕화선녀가 수녀시절에 잘 알던 분이 어린이 대공원에 무슨 관계자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 사람에게 대공원 매점을 하나 허가내 주도록 하여 평생 안정된 생활을 하도록 배려했던 것이니 아는 분들은 덕화선녀의 심덕을 성모마리아 이상으로 우러러 보고 있던 무렵,

 

 

내가 수행하는 도중 불암산에 잠시 들리는 계기가 있었는데 그 곳에서 만나게 되어 道談으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선문답 하다가 서로 뜻이 通하는 데가 있었는지라 자연스럽게 도반이 되었던 것이다. 금단결 황정경 천부경 음부경 소녀경 도인통감 등 도방에서 흔히들 교재로 삼는 고서에 대한 비판적 시각으로 갑론을박 하며 토론을 하는데 처음에 느낀 바로는 대단했다고 생각된다. 실로 큰 스님들도 대화도중에 말을 회피했다고 하니 하여간 奇人이었다.

 

 

아마 지금이라도 상면하게 되면 옛 생각하며 도반으로서 손색이 없을 것으로 믿는다. 그렇지만 이성간이 되어 젊어서는 상당한 제약이 따랐으므로 철야수행은 시도조차 못했으나, 지금은 늙었으니 상관이 없을 것으로 나름 생각해 본다.

 

 

德和仙女와의 수행담은 무궁무진하지만 모두 소개하려면 후일을 기약해야 할 것이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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