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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변의 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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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7-03-23 16:18 조회1,78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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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통변의 묘

홍석희고문 부인의 방문(1987년 겨울)

이 분은 이때 상담하며 알게 되어 나를 지극히 존경한다는 나머지 학술연구비를 아낌없이 지원하는 분이어서 난명학회 고문으로 추대된 분인데, 궁금했던 문제는 언제 아들을 낳을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였다. 딸만 2녀가 왔는데 8년이 지나도록 잉태가 되지 않을뿐더러 홍씨 가문에 대가 끊기게 생겼다며 지극히 아들을 원하던 가정이었다.

큰 딸은 1976년생, 작은 딸이 1979년생이니 아들이 기다려질 만 했던 것이다. 이러다가 영원히 득남을 못하면 입양이라도 해야 하나 고민이 많던 시기였다. 남양홍씨 家門의 장손으로서 선친이 유교사상에 뿌리가 깊고 가문을 매우 중요시하는 봉건적인 사고가 확고했던 분이다. 그러므로 대가 끊긴다는 것은 언감생심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니 長婦로서도 자기의 책임을 다하려 무단히 애를 쓰던 중이었다.

 

홍고문 명조를 공개하고 싶으나 연구생들에게만 공개하기로 한다. 丁亥生이며 부인은 己丑生이다. 사주를 보면서 21자로 3남매 운이라고 기록해 놓고 아들이 늦게 올 것이니 1989년까지 기다려야 한다. 라고 통변해 주었다. 감명할 때로부터 2년 후지만 만으로 1년만 기다리면 잉태하리라 했는데 지내보지 않고는 누가 믿으려 하겠는가?

 

결국 1988년 여름에 임신하여 1989년 봄에 옥동자가 탄생했던 것이다. 홍고문은 정밀기계 제작을 하는 사업가로서 매사에 치밀하고 千分미리를 다투는 분이어서 분명하기를 좋아하는데 감명기록을 믿으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감명지를 책갈피에 끼워놓고 방치했다가 드디어 아들이 탄생했으니 통변했던 기록이 생각나 펼쳐보니 정확하게 맞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를 찾고자 백방으로 연락도 취하고 알아봤으나 찾을 수가 없었다며 6년이나 지나서야 소식을 듣고 방문하여 큰 절을 하며 인사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때 거제리 사무실은 폐쇄하고 일본과 미국으로 다니다가 1993년도에 동래구 온천동으로 이사를 오게 되어 공백기간이 길었던 때였다.

 

그때부터 사업자문을 구하기에 이르렀는데 당시엔 소규모 수준의 사업이었지만 난명학의 자문을 받기 시작하면서 대규모로 확장되어 지금은 굴지의 정밀기계 제작 수출업체로 성장했던 것이다. 지금도 홍 고문님은 대야농장에 자주 들리며 형제와 같이 우호적인 분이다. 그 아들은 훌륭하게 성장하여 일본유학을 마치고 미국의 대기업에 취업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홍고문께서는 난명학회 회원들의 合宿수련할 때도 물심양면으로 아낌없는 지원을 해주신 분이다.

 

이런 인연이 있은 후 홍고문은 하루도 쉬지 않고 연구하며 생산공장에서 직원들과 같이 생활을 했는데 어느날 내가 CEO의 경영기법을 설명하면서 경영주가 되려면 자기 시간을 많이 가지고 일은 직원에게 전적으로 책임지도록 한다면 더욱 발전하게 되리라 했다. 당시만 해도 새벽같이 본인이 먼저 출근하고 직원이 퇴근해야 뒷 처리를 하고 귀가했던 습관이 몸에 배어있는지라 나와 함께 정기적으로 휴일을 정하여 전국 유람을 하기에 이르렀는데 그래도 대인기질이 잠재해 있는 분인지라 얼마간 공장운영상태를 보니까 정말로 오너가 없어도 공장은 빈틈없이 돌아가더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마도 십 수년을 부부동반하여 여행을 하기도 했고 사고영역을 넓혀가기에 이르렀다고 본다.

 

한때는 눈 쌓이는 겨울마다 저 멀리 태백산까지 산새모이를 한 배낭씩 싸 짊어지고 미끄러운 산길을 오르기도 했으며 비로소 산새와 대화도 느끼게 됐고 무한한 자연의 신비를 체험하면서 기업인으로서 자연의 도에 심취하기도 했는데 그런 일이 있고 난 이후로 사업도 번창하여 개인노력으로 아무나 이루기 어려운 중소기업을 일구게 되었던 것이다. 지금도 홍고문과의 기행이 그리울 정도로 정도 들었다. 앞으로도 기회가 주어진다면 노년에 다시 재도전해보고 싶은 마음이다.

 

3(온천2동으로 이주하다.)

여기서부터 본격적으로 부산상담을 하기에 이르니 재계와 정계를 비롯해서 수많은 일화를 만들어 내게 되었다.

 

부산에 있는 모대학 정교수 부인 申氏가 내방했다. 정교수 내외의 사주를 감명의뢰 했는데 대연동에 거주하는 천주교 신도였으나 나에게는 비교적 천주교 신도들이 많이 방문했다. 왜냐면 부적을 써라 이름을 갈아라 굿을 해라 하는 등의 거부감을 주지 않기 때문이며 순수한 학문의 잣대로 판단하기 때문일 것이다.

 

개인 신상에 관한 문제로는 병술생 처와 기유생 딸이 있었는데 정교수의 팔자에는 필시 아들이 있었으나 부인 사주에 아들이 없는지라 정교수가 혹 소실을 두어 아들을 낳으려 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아들을 입양하려는가 하고 살펴보았는데 당면한 운에 득자운이 왔는데 부인과는 7년간 이별운이 당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인과법으로 봐서는 부인과 이별하는 연분은 아니었다. 개띠가 절대적인 배우자로 해로할 인연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부인의 말로는 대학교 弟子중에 무술생 개띠와 불륜이 생겼다는 것이었다. 근래 집에도 잘 들어오지 않고 내놓고 열애중이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어차피 개띠를 만났으니 부인과 이별하고 개띠제자와 해로인연을 맺을 것인가. 판단이 어려웠다.

 

제자개띠의 생년월일을 물었더니 마침 알고 있었다. 부인은 병술생개띠고 제자는 무술생개띠였으니 개띠라 할지라도 정신이 달랐으므로 정밀한 분석이 요망되었다. 명조를 공개해야 이해가 되겠지만 사생활의 프라이버시로 인해 공개를 보류한다.

 

신여사의 운이 7년간 남편과 이별운에 당도해서 일시적으로 남편을 무술생개띠한테 양보해야 하는 운으로 해석된다고 말해주며 부인이 때를 기다리면 남편이 제자리로 돌아올 것이라고 위로해주었다.

 

그러나 부인은 남편의 배신을 용서할 수 없어서 이별하고 자기도 재혼하겠다고 의기양양했다. 당시 나이가 48세였으니 응당 그런 생각도 무리는 아니었으나 어차피 남편을 이별하게 되는 운이 와서 이지경이 되었는데 이런 시기에 재혼이 가능하겠는가? 하며 재혼을 하더라도 55세까지 불운을 통과해야 가능할 것이니 이래저래 때를 기다림이 마땅하다고 했다.

 

상식적으로 55세가 되어 재혼을 한다 할지라도 정교수보다 나은 사람을 만난다는 보장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던 중 무술생개띠와의 사이에서 득남하므로 정교수가 무술생에게 아들을 본처앞으로 출생신고를 해주자고 권유했으나 완강히 거부하며 자기 권리를 주장하더라는 것이었다. 하는 수 없이 본처와 합의이혼하기에 이르렀는데 신여사는 이혼하고 친정인 대구로 떠났고, 무술생과 알콩달콩 아들을 바라보며 재밋게 지내던 어느날 무술생 후처에게 첫사랑이 나타나게 되어 부득이 후처와도 이별을 하기에 이르니 결국은 본처를 찾아와 손이 닳도록 빌더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운대로 재결합하였고 아들은 본처가 기르기로 했던 일화이다. 이때 신여사가 나를 만나지 않았다면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아무도 예측이 어려운 일이다. 그러므로 사주를 제대로 판단해주고 자기 자신을 알도록 잘만 지도해준다면 파탄이 나야할 가정이지만 일시적 탈선의 시기가 있었다 할지라도 위와 같이 새로운 모습으로 가정을 지킬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신여사는 수시로 나에게 와서는 쓰린 가슴을 달래가면서 과연 팔자대로 살아야 하느냐며 위로를 삼았던 것이다.

 

그럴 무렵 갓 대학을 졸업한 딸이 있었는지라 그 딸의 장래도 많이 고려되었을 것은 불문가지라 하겠다. 한번은 딸에게 남자친구가 생겼다며 궁합을 문의한 것이다. 딸은 부산여대를 졸업했는데 남자친구는 서울대를 졸업했다고 했다. 이름으로 서울대에 학적조회를 해본 결과 사실이었다고 한다. 이때 자칫하면 나도 속을 번한 경우였다.

 

그런데 그 따님의 팔자에 명문대출신을 배필할 수 없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에 의심을 하기에 이르러 사실검증을 시켰던 것인데 실제로 서울대학을 졸업한 사람의 이름을 사용했으며 시는 모르지만 나이와 생일까지 완전히 가명으로 사용했으므로 완벽한 서울대 출신으로 행세한 경우였는데 사진을 보자고 하니 광안리 해수욕장에서 찍은 카메라 사진을 보여주어 살펴보고는 가짜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 추적조회를 당부했던 것이다.

 

그 남자친구의 부모를 먼저 만나보라고 일렀는데 주소지까지도 실존인물을 가장했다가 그만 꼬리를 잡히고 말았던 일화였다. 이런 일까지 나의 신통력을 믿지 않을 수 없게 되자 더욱 내가 판단한 재결합에 신뢰를 하게 되었는데 신기하게도 정확히 호적상 이별한지 꼭 7년이 되자 정교수와 무술생제자가 헤어지게 되므로 본처와 재결합이 자연스럽게 이뤄졌던 것인데 정교수는 한번 만나자고 했으나 부끄럽다며 나타나지 않았으나 재결합이 이뤄지고 나서는 신여사도 다시는 발을 끊어버렸던 것이다. 아마도 딸의 사기연애로 인해 소문날 것을 두려워했을 것으로 짐작할 뿐이다.

 

대체로 출가전 딸의 문제로 불미스러운 일이 있는 분은 지금까지 한 사람도 문제가 해결되고 나서는 찾아오는 분이 없었다.

 

 

4

남천동에 거주하면서 광안리에서 소아과를 운영하던 강원장 부인이 내방했다. 아들 둘이 있는데 큰 아들은 연세대 의대에 입학하여 공부를 잘 하고 있었는데 작은 아들도 의대진학을 목표했으나 학점이 미달하여 재수를 하던 중이었다. 동생은 자존심이 강하여 형과 같이 연대의대를 고집하였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여 낙심천만이던 중 일단 재수는 하되 연대는 불가하고 인제대로 겨우 진학되리라고 감명해주었는데 그해 겨울 예비고사에서 인제의대도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던 것이다.

 

대체로 진학생을 둔 어머니들은 진학기도에 인생을 걸기도 한다. 그러니 재수하는 기간 절이면 절, 산신기도며 백일을 목표하여 온갖 기도를 다 드리는데 그 시기에는 지리산 최대사님의 기도능력을 내가 좀 아는지라 이왕지사 기도를 드리려면 대사님한테 가라고 안내해 주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절에는 가지 않고 오직 대성산 기도처에 대사님께 찾아가서 기도공덕을 드렸는데 드디어 예비고사 시험 때가 당도한 것이다. 시험결과는 원서나 낼 정도로 부진했었다.

 

지원서를 써가지고 인제의대에 제출했는데 합격선에서 8명이나 후순위였던 것이다. 그러니까 자기 앞에 있는 8명이 빠져나가야 겨우 등록금이라도 내게 생겼는데 절망적인 장벽이 되었다. 그래서 최대사님께 가서 철야기도를 하며 내가도 지원사격을 아끼지 않고 정신일도하며 기도삼매에 들었는데 등록마감일에 통보가 왔던 것이다. 등록금 가지고 속히 오라는 희소식이었던 것이다. 이런 일련의 일들이 과연 기도공덕이었는지는 지금까지도 의문이지만 하여간 등록하여 입학을 하게 되었는데 이때 가정에서는 평생 잊지 못할 우환이 생겼던 것이다. 왜냐면 그의 부친이 아들입학 때문에 얼마나 신경을 썼던지 합격통보를 받고는 그만 뇌졸중으로 쓰러져 유명을 달리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후 큰 아들은 경기도 부천에서 개원하여 병원을 잘 운영하고 작은 아들은 페이 닥터로 지금까지 근무하고 있다. 얼마 전까지 대야농장으로 연락이 오곤 했는데 두 아들 모두 결혼이 성사되고 나서는 연락두절이 된 경우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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