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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7-01-26 16:32 조회1,52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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却說하고, 이날 밤은 咸陽 宅에서

하루 밤을 지내고 다음날 아침 일찍 선생님 內外분과 老母(甲辰生)를 모시고 서울로 올라갔다. 내려올 때는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金泉에서 내려 國道를 이용하여 거창을 거쳐 함양으로 갔었는데, 上京할 때는 六十嶺을 넘어 장수, 진안을 거쳐 全州로 해서 호남고속도로를 이용하여 서울에 도착했다. 運行中에는 별다른 말씀이 없었고 서울에 도착하여 그날은 선생님 댁에서 묵게 되었고 다음날부터는 아침에 댁에 들려 선생님과 時間을 같이 하면서 포항제철 서울본사에 들려 박태준회장도 만났고 상업은행장과 홍주필도 만났으며 여러 知人들을 만나보며 시간을 보냈는데 상업은행장을 만나게 된 배경에는 내막이 있었지만 여기서 밝히지는 않겠다.

 

(선생님이 작고하셨으므로 이때의 비화를 공개해도 되지 않겠나 싶어 소개하려 한다. 앞에서 밝힌 바 있듯 김장군과 동주건설 사업을 하실 때, 연희동 집을 담보로 하여 5억 원을 대출받았는데 부도로 인해 채무변제를 못하게 되어, 은행에서 경매처분 하겠다는 통보를 받게 되었던 것이다. 경매기일이 잡혔고 채무변제를 못하면 집이 없어질 판이니 급했던 것이나 당장 변제할 여력은 없고 하니 이 문제를 슬기롭게 해결해보려는 시도에서 박회장을 만나 사정을 이야기하기에 이른 것이다.

 

당시 포항제철에서 상업은행에 예탁한 예금이 600억 원 정도라고 들었다. 그 정도의 고객이라면 은행장이라 할지라도 경매를 유예할 수 있지 않겠나 하여 박회장 한테 사정을 이야기 한 것이다. 물론 나도 동석해 있는 자리에서였다. 선생님은 나에게 만큼은 개인 속사정을 감추려 하시지 않았다. 그 만큼 신뢰하며 함께 해결책을 찾는데 힘이 되어주기를 기대하셨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미 박회장님은 나와도 면식이 있고 나를 무척 신임하셨으므로 거부감이 없었던 것도 부담을 덜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때 내가 박태준회장님께 해결책을 제시했다. 상업은행에 예치돼있는 예탁금을 몽땅 引出하겠다고 협박하면 은행장이 5억 원 정도는 탕감도 해주지 않겠냐.?고 하니 박회장이 아주 좋은 생각이라며 은행장을 포철본사 사무실로 부른 것이다.

 

대뜸 현재 예치잔고가 얼마나 있느냐고 물으니 정말로 600억 원이 조금 상회한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제산선생님의 고충을 이야기 하고는 해결방안을 찾아봐 달라고 하자 곤란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박회장님이 그렇다면 당장 예탁금 600억 원을 인출해 오라고 하자 그 자리에서 은행장이 무릎 꿇고 엎드리며 해결책을 꼭 찾아드릴 터이니 고정하시라며 땀을 뻘뻘 흘리는 것을 보게 되었다.

 

내 생각에는 5억 원을 탕감해주는 걸로 알았는데 나중에 결과는 채권의무를 무제한 보류하겠다는 것으로 결론이 내려졌다고 들었다. 그래서 모든 재산의 담보된 명의를 풀어주고 제산선생님 앞으로 부채만 남겨놓게 되므로 이기회에 모든 명의를 가족들 앞으로 이전시키는 작업에 착수했는데 부인명의로 해도 나중에 채무이행을 해야 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여 처갓집 친척들 앞으로 명의이전을 하게 되어 선생님은 작고하실 때까지 자신의 통장이나 명의로 일체의 재산을 보유하지 못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도인답게 무일푼으로 사시다 떠나셨던 것이다.

 

아직 사모님이 생존해 계시므로 後談은 생략하지만 선생님이 일찍 세상을 뜨시게 된 원인도 재산문제 때문 있었음을 나만이 알고 있을 뿐이다.

 

 

서울 일정을 끝내고 내려올 무렵 마지막으로 현 역술인 협회회장을 지내고 있는 백운산씨 사무실에도 들렸던 것으로 기억된다. 선생님께서 白雲山에서 得道하셨으므로 白雲山이란 이름에 호기심이 가셨는지 내가 안암동에 계신 관상학의 은사이신 양학형 선생님께 問安드리고 부산으로 내려간다고 말씀드리자 같이 가자고 하시므로 안암동에 들렸는데, 선생님은 양학형선생님 댁에는 들어가지 않으셨고 近處에 있는 白雲山사무실에 혼자서 들리셨던 일이 있다. 후일 백운산씨를 만나서 이야기를 듣게 되었는데 명조를 통변하시는 것을 들어보니 참으로 제산선생님의 實力境地였다고 말했다.

 

백운산씨는 내가 관상학을 공부하던 時機에 알게 되었는데 백씨는 관상학을 체계 있게 배운 것이 아니고 독학으로 공부해서 광고에는 관상학회 회장이라고 선전 할 정도로 재주가 뛰어난 사람이다. 그래서 뜻있는 관상전문가 사이에 홀로 會長이고, 職員이고, 受講生이라고 회자되기도 했던 것이다.

 

18일에 부산으로 내려왔다. 炫國이도 부모님이 계신 一山農場에 있다가 버스 편으로 내려왔고 나는 선생님과 둘이서 승용차로 내려왔는데 智山莊도 벌써 와서 집안 整頓을 다 해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부산교육대학 정문 앞에 있는 霽山精舍家庭집이었다. 정원도 넓었고 방이 세 개가 있으며 현관도 있는 洋屋이었다.

 

그 집에 들어서며 陽宅을 보니 집은 크고 좋았는데 공부하는 子息不發하는 집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러므로 아들공부 때문에 서울로 移徙를 가게 되었던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마도 다음날인 19일부터 손님 相談을 한 것으로 기억되는데 문간방은 상담실로 사용하고 뒷방은 接受室 겸 우리 세 사람의 宿所使用했고 안방은 선생님이 쓰셨다. 방이 비교적 컸으므로 不便은 없었고 지산장의 친척인가 되는 부인이 와서 밥을 해주게 되었고, 여관에서나 마찬가지로 나는 접수를 보고 지산장과 炫國은 대필을 했으며 접수가 끝나면 내가 들어가 대필을 거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선생님이 부산에 도착 하시자마자 어디서 소문을 듣고 몰려오는지 다음날부터 손님들이 밀어닥치는 것이었으니 처음에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들이 많았던 것이 사실이다. 후일에야 그 신비를 알게 되었지만 어떻든 처음에는 神奇하기 짝이 없었으며 선생님의 능력이 더욱 偉大해 보였고 참으로 道人神秘함 그 自體였다고 回顧된다.

 

業務始作하자 새벽 6시부터 손님이 몰려들어 待期하는 손님들은 順番을 지키느라 아침부터 저녁까지 꼼짝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어느 손님들은 김밥과 도시락을 싸가지고 오는 분도 있었으며 어느 분은 빵으로 끼니를 때우기도 했으나 어떤 분은 때를 굶기도 했던 것이다. 相談室에 있는 문객들은 相談妨害가 될 수 있으므로 숨을 죽이고 있지만 接受室에서 대기하는 손님들은 커피자판기라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사람도 있고 주변에 다방은 없느냐는 사람도 있었다. 이는 커피가 먹고 싶다는 암시가 아니겠는가.

 

[얼마전에, 옛날 제산선생님의 단골고객이 蘭明學會로 나를 보러 왔는데 옛날 제산정사 때를 생각하고 가족四柱를 다 보려면 하루종인 기다려야 하는 줄 알고는 도시락을 싸가지고 세 식구가 와서는 상담을 받고 갔다. 참으로 우습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당시 제선정사에서는 이런 일이 매일 반복되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 분의 따님은 지금 蘭明學會 會員이 되었다. 이 글을 보면 웃음이 나올 것이지만 지나간 일화를 소개하려다 보니 讀者理解를 돕기 위해서 올리는 글이므로 넓은 양해 바란다.]

 

各設하고, 우리는 가끔씩 커피도 마시고, 여사가 과일도 내오면 먹고는 했는데 대기 손님들은 점심도 굶고 기다리는 것이었으니 人情 많다고 소문난 나로서는 도저히 그냥 두고 볼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하다못해 커피라도 끓여서 대접하자고 생각하고는, 당시 초이스 커피한통이 만원이면 큰 것을 살 수 있었고, 중간크기는 6천원인 것으로 기억된다.

그래서 여사에게 내 돈을 주고는 손님대접을 하도록 부탁했는데 이것이 문제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선생님은 살림살이에 일체 신경을 쓰지 않는 분이다. 그렇지만 내가 손님에게 커피를 대접한 것이 나중에 큰 문제가 되었는데 자세한 내용은 讀者들의 판단에 맡긴다.

 

[세월이 많이 흘렀으니 내막을 소상히 소개하고자 한다. 손님에게 커피를 제공한다는 소문을 듣고 사모님이 오셔서 커피를 주지 않아도 손님이 메어터지는데 왜 커피를 대접하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이여사가 차선생님이 사주신것이라고 하자 누군 돈이 없어 그러는 줄 아느냐며 건방지다고 대놓고 야단법석을 떨었으니 내 자존심에 먹칠이 되었고, 처음 만나뵜을 때 깐깐하다는 인상은 느꼈지만 하루에도 수십만원씩 상담료를 지불하여 방문하는 분들에게 커피한잔 대접하는 것이 아까워서 그런지 도무지 이해하기가 어려웠던 것이 사실이다. 이런 저런 일마다 사사건건 내 적성에 맞지 않는 사모님의 행태에 크게 회의를 느꼈다. 이런일이 자주 반복되므로 결국 그해 겨울을 넘기지 못하고 제산정사를 물러나야 했던 일화중 하나이다.]

 

나는 뒷방 접수실에서 거의 살다시피 했고 지산장과 현국은 상담실에서 대필을 했다.

그렇지만 상담실보다 접수실에 대기 손님들이 더 많았던 것이다. 여관에 있을 땐 觀相에 대해서는 일체 신경을 쓰지 못했지만 접수받으면서 時間的 여유가 있으므로 간간 대기 손님들의 을 봐주게 되었던 것이 소문나서 손님들은 자기의 순서가 될 때까지 거의 접수실에 붙어 앉아 떠날 줄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접수하면서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서 서비스했던 것인데 인기가 꽤나 많았다고 생각된다.

 

이때 鄭女史(김민전모친)가 이웃에 살았던 고로 거의 매일같이 와서는 이야기 하며 시간을 보내곤 했는데 하루는 점심을 먹고 잠시 쉬는 時間庭園에서 나에게 觀相을 봐달라고 했던 것이다. 재미로 손바닥을 보다가 내일 오후 2시면 연산동에 팔려고 내놓은 집이 계약될 것이라고 말했던 것인데 이것이 들어맞았던 것이니 차선생님 말대로 집이 팔렸다고 온통소문을 퍼트리는 바람에 接受室四柱를 보지 않는 사람들까지 몰려들었던 것이다.

 

이는 사실상 선생님께 누를 끼치는 결과였다. 선생님이 상담하실 때는 많은 觀客이 지켜보고 있어야 더욱 神明이 나고 입을 버리고 넋이 나가서 들어주는 雰圍氣가 형성될 때 더욱 통변에 탄력을 받게 되어 힘든 줄 모르고 상담을 하게 되는데 자기 차례가 되어야만 한 두 사람씩 상담실로 들어가고 있었으니 둔한 나로서는 그러한 妙味를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도 실수라 할 것이다. 아마도 제산정사를 방문했던 분이 이 글을 읽는다면 充分理解할 것이다.

 

선생님께 相談받은 분들의 말을 들어보면, 남의 四柱를 볼 때는 참으로 신비스럽게 생각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自己家族四柱를 볼 때는 그다지 神秘感을 느끼지 못했다는 것이 通說이었던 것이다. 어떤 사람은 선생님이 통변하실 때 당신 남편이 무슨 띠가 인연되었고 아들은 무슨 띠며 딸은 무슨 띠로 왔구나 할 때마다 궁금해서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진짜로 맞느냐고 묻기도 하는 것이니 이럴 때마다 선생님은 더욱 신명이 나서 큰 소리로 읊어내는 것이었다. 그런데 相談室을 꽉 메워야 할 손님들이 모두 接受室에 와서 소곤거리고 있으니 선생님의 心氣不便했을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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