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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7-04-02 16:16 조회1,67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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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이야기

1995년 금영철강 서영우회장님 내외분이 방문하였다. 비교적 운명학계에서는 정평이 났다고 하므로 많은 사업가들이 줄을 잇고 있을 무렵이었다.

 

壬癸甲丁

子亥辰丑

 

명조에서 보여주듯 지역사회에 소문난 부자그릇이 분명했다. 자평명리 수준으로 보면 년상의 정화가 무력하여 어찌 준 재벌이 되겠냐고 의문을 갖기에 충분했지만 내 눈에는 최소한 1조 단위의 부자임에 분명했던 것이다.

 

이 명조를 감명한 것이 서회장 나이 갓 60세가 되던 해였다. 그때의 운로는 亥水大運끝으로 지나가던 시기다. 당시 청와대 소산이 기해생이었으니 서회장과는 악연임에 틀림이 없었다. 큰 부자들의 명조를 볼 때는 그 분의 업계에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인물을 모르고서는 정확한 판단이 어렵다는 것이다. 그래서 소산의 인과를 이분의 대운으로 보충하여 판단하게 되었던 것이다.

 

왜 그렇게 생각 했는가 궁금할 것이다. 당시 小山이 동보철강 모씨와 협잡하여 굴지의 금속계를 장악하려 했기 때문에 방문한 목적이 그와 연관되었을 것이라는 짐작만으로도 답은 나와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정태수 한보철강 회장도 내가 조언해 주었는데 당시 언론에 공개된 바와 같이 김용옥 도올선생이 멘토가 되어 내 말을 듣지 않고 도올선생의 말만 들으므로 종내는 패가망신하기에 이르렀던 경험도 있었던 때이다. 이분도 내가 머지않아 김영삼 정권에서 일시 흥하는가 하는 순간 패가망신할 것이라고 기록으로 남겨준일도 있다.

 

그때 서회장이 하소연하는 것이었다. 포항제철에서 생산되는 스테인레스 총판권을 小山이 강제로 빼앗으려 한다는 것이다. 어떤 제의가 들어왔느냐면 300억 원을 줄테니 손을 떼라는 협박이었다. 당시 시가로는 1천억대가 넘는 규모였다는 것이다. 얼마나 억울했겠는가?

그래서 그쪽 제의를 받아들이는 것이 옳으냐 아니면 무슨 수단이 있느냐? 하는 문제였으니 나로서는 아주 간단하게 해답이 나와 있었던 것이다. 왜냐면 2년만 지나면 서회장에게 일생에 둘도 없는 대운이 도래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당장은 빼앗기지 않을테니 차일피일하며 부딪지 말고 시간을 보내라고 일러주었다. 그러기를 1년이 지날 무렵 강도높게 압박이 심해오기 시작했으니 서회장으로서는 정신적 고통이 이루 말 할 수 없었을 것이 명약관화한 일이었다.

 

199612월 하루는 서회장이 늦은 시간에 달려와서는 도저히 이대로 넘어가기 어려울 것 같다며 대책을 강구해 달라며 차선생님 말씀듣고 이대로 버티다가는 300억 마저도 날아갈 판인데 그렇게 되면 생계조차 걱정이라며 죽는 소리를 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봐도 길은 열려있는데 무지몽매한 중생이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므로 마음고생을 하는구나 입속으로 중얼거리며 과단성 있는 대안을 제시했던 것이다. 만일 300억이 날아가면 그 돈을 내가 책임지고 드리겠다고 호언장담을 하게 된 것이다. 실로 내가 무슨 돈이 있겠는가 마는 그만큼 자신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앞으로 몇 달만 지나다 보면 현철이가 수감될 것이니 그때는 서회장의 권리에 침해를 받지 않게 되리라고 강조해 주었다.

 

서회장님도 고민이 많았을 것은 불문가지다. 그러니 잠을 자다가도 전화가 오고 시도 때도 없이 전화가 와서 귀찮을 때도 많았지만 나 자신도 이렇게 거대한 국가적인 권력이 연루된 사건에서 학문을 검증받는 계기가 되므로 인내하며 때를 기다렸던 것이다. 1997년 초 드디어 예고한 대로 소산이 구속되기에 이르니 판권은 자연히 서회장 소유로 권리가 유지되었던 것이다. 이때부터 연간 2천억 규모의 매출을 올려 많은 축재를 하게 되었는데 원체 구두쇠 영감이 되어 매달 몇 백만 원씩 용돈을 5년간 주어서 잘 받아썼던 것이다. 그래도 신의 직장에 다니는 사람의 고 연봉 수준을 되었다고 생각하며 감사한다.

 

이후 서회장도 상당히 많은 경제인을 비롯해 고위공직 및 정계인사도 소개해 주므로 나의 예언에 따라 장관까지 오른 분도 몇 분 있었다.

 

이 외에도 수많은 실화가 있는데 너무 유명한 분들이 되어 이 자리에서 공개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일화, 노무현 대통령 일화 및 이회창 대표의 일화를 비롯 이인제의원님 최병렬대표 추미애대표 한화갑씨 등 실존유명인사들이어서 감명실록을 밝히는 것이 혹 누가 될 것 같아 이만 줄기기로 한다. 그러나 거의 실수는 없었다고 자부한다.

 

나중에 박근혜대통령이 헌재가결로 현직에서 물러나신다면 그 분의 명조를 공개하여 나라가 이렇게 된 운명적 통변을 공개하여 다시는 그런 누를 범하지 않도록 경계하고자 한다.

 

 

김대중과 이회창 이인제 대결

 

1994년 여름 가뭄이 심해 온 나라가 갈증에 시달리던 시기였다.

이때부터 다음정권에 관심이 지대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나야 방문하는 분들의 운명이나 분석해주면 되지만 나에게 찾는 이들의 관심은 미래대권에 관심이 컸던 것도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1992년 김영삼 전 대통령과 박태준씨가 대선에 공식출마하기 직전 한판 힘겨루기 할 때 제산선생님이 김영삼이가 대통령 되면 나라가 망한다고 하시는 말씀을 박태준씨가 듣고는 모 유세장에서 과감히 상대후보 비난의 화살을 퍼붓다가 결국 일본으로 망명을 떠나있어야 하는 분운이 겪었다.

 

그때 분위기로는 민자당합당 이후가 되어 후보경선을 치루게 되어있었으나 막상 경선을 치루게 되면 김영삼씨가 탈락할 위기까지 갔던 것도 사실이다. 이때 김덕룡씨와 서울 국제호텔에서 만나게 되었는데 경선할 경우 누가 우세 하겠는가?를 물었을 때 당시의 운세로 보면 김영삼씨, 이종찬씨, 박태준씨 삼자대결구도로 갔을 때 김영삼씨가 조금 약세를 면치 못할 것 아니냐는 분석이었으므로 정치9단의 김영삼씨는 경선을 거부하고 단일후보가 되었던 것이다. 이때 생각하기를 과연 김영삼씨가 평생 야당생활을 하면서 그냥 정치를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다. 만약 경선해서 김영삼씨가 탈락했더라면 IMF는 겪지 않았을 것이다. 김영삼씨는 時上正官格으로 능히 대통령 그릇은 됐지만 사주팔자에 국가재물이 없었던 것이어서 국가부도사태는 이미 예고돼 있었던 것이기 때문이었다.

 

각설하고

다음대권에도 지대한 관심사가 되었는데 당시 한나라당 전직 의원을 비롯 이회창씨에 대한 기대가 컸던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이회창씨의 명조는 지금의 박근혜대통령보다야 훨씬 좋았지만 나는 청와대 자리의 地氣도 영향력이 크다고 봤기 때문에 相學의 이치를 반드시 참고하는 사람이었는지라 여성대통령이나 안경 낀 대통령이 청와대에 들어가면 나라가 혼란스럽고 임기를 채우지 못할 일이 생기며 나라가 망한다는 학설을 의심해본 일이 없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변함없이 주장하는 바이다. 지난번 박근혜후보가 당선될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었으므로 대선전에 대야농장에 전 직원을 해고하여 소비지출을 막았던 것이다. 이때 슬기롭게 대처하지 못했다면 대야농장은 부도를 당하고 말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면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면 나라경제가 망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선조치를 취했던 것이다.

 

불행하게도 이회창씨는 시력이 매우 나빠 두터운 안경을 착용하였으므로 절대 재목이 아니라고 단호히 선언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당시 여론조사결과를 보더라도 김대중 전 대통령은 전혀 가능성이 보이지 않았으니 내가 뭐라 말하든 믿으려 하는 사람은 없었다고 생각된다. 당시 사상구에서 의원을 지내신 서석재씨를 비롯 한나라당 지구당원을 비롯해서 상당히 많은 분들이 물었지만 시종일관 이회창씨는 아니다 라고 하자 북구 국회의원이었던 정형근씨는 내가 목포상고출신이라 김대중을 편든다고 할 정도였으니 웃기지도 않은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런 일이 반복되었으니 일부 財界인사를 포함 정치와 무관한 분들을 제외하고는 한나라당 당원들은 내 사무실에 발길을 끊었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안 된다고 하는 철학관에 찾아올 이유가 있겠는가. 이회창씨가 대통령이 된다고 하는 철학관을 믿고 싶었을 것이고 부정하는 나를 외면할 뿐 아니라 차예산은 사주도 볼 줄 모르는 사람이라고 악평까지 서슴지 않았으니 말이다.

 

어떤 중소기업인들은 한나라당에서 집권을 해야 권력에 기생하여 덕이라도 보려는 분들도 상당히 많았던 것이 사실이다. 정치자금도 기부하며 올인을 했던 분도 여러분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 일로 인해 정치권력과 무관한 분들만 간혹 찾아주었으니 1997년 대선이 끝날 때까지 거의 사무실이 한적했다고 고백한다. 더구나 입시제도도 바뀌어 그렇게 많이 찾아오던 학부모들도 발길이 끊겼으니 내가 허탈했던 사정을 어느 정도 짐작이 갈 것이다.

 

다행스러웠던 일은 일본 고베에 기업인들이 나의 경영철학의 이론을 경청하기를 원하므로 매년 한 두 번씩 출장을 다녀왔으며 한번 다녀오면 1년 아이들 유학자금과 사무실 운영비가 충당되었으므로 한가했던 중에도 부족 없는 생활은 이어갔던 것이다. 그리고 간간 미국으로 가서 달러를 벌어다가 쓰기도 했으니 별의 별 생각도 하게 되었던 시기였다.

 

정치문제는 지역정서에 따라 맞고 틀리는 것을 떠나서 문객의 비위를 맞춰주는 상담기법도 필요할 때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안 해본 것은 아니다. 그러나 너무 곧은 성품이 되어 죽었으면 죽었지 그럴 수는 없었던 당시의 심경을 밝히는 바이다.

 

당시 일본에 한번 출장을 가면 약 2주가량 체류했는데 엔화로 약 5백만엔 정도는 수익이 발생했으니 당시 환률가치로는 약 450:100이었기 때문에 경제적인 궁색은 없었던 것이다.

 

그럭저럭 1997년 대선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인제씨와 이회창씨와 김대중씨 등 삼자대결이었는데 눈치로 보게 되면 당연히 이회창씨가 청와대 주인이 되었던 시기였다. 그렇게도 안된다고 큰 소리 치던 나로서도 혹시나 하는 생각에 여차하면 부산사무실을 폐쇄하고 미국으로 들어가야겠구나 했던 때도 없지 않았다.

 

1219일 선거일이었다. 아침 6시에 투표를 하고는 미국 들어갈 모든 준비를 해서 승용차에 싣고는 강릉 경포대 해수욕장 근처에 사시는 과거 언론계에 계시다가 동백림간첩단 사건으로 마음고생을 하시던 선배님이 계신지라 거기서 숙박하고 당선발표가 나면 강릉공항에서 도미하려고 발길을 옮겼던 것이다.

 

천천히 구경도 하면서 경포대에 도착하니 밤 10시가 되어서였다. 라디오로 개표결과를 들으며 가는데 그때까지 이회창 후보가 약 5만표 앞서고 있었던 것이다. 아차 내 판단이 틀렸구나 그렇다면 나는 한국에 살 수가 없다고 다짐하며 선배한테도 김대중씨가 당선되리라고 했었는데 체면상 선배집으로 갈 수가 없어 호텔에 숙박하게 되었는데 10반경 TV를 켜고 보니 김대중씨가 반전되어 점점 리드해 가는 것이었다. 그날밤 한잠 못자고 개표결과를 지켜보았는데 아침 6시가 조금 지나서 김대중 후보가 당선확정이 된 것이었다.

 

이는 곧 내가 당선된 것과 같은 기분이었다. 예언의 문제였기에 자존심을 회복하게 된 것이므로 미국으로 갈 이유가 없었다. 아침식사도 하지 않고 발길을 되돌려 부산에 도착하니 전화가 불이 나는 것이었다. 당시에 핸드폰도 있었지만 사무실 전화에 불이 났던 것이다.

 

그 후로 2년간 발길을 끊었던 고객이 몰려들기 시작하여 몇 개월만에 2년간 공백이 되었던 보상을 받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 후로 한나라당 당원을 비롯해서 지구당 당직자들까지도 깊은 관심을 보여주므로 바쁜 나날을 보내게 되어 일본에도 가지 못할 정도였다고 말 할 수 있었다.

 

그때 미국으로 들어가려고 구입한 비행기표는 사용하지 않고 지금까지도 기념으로 간직하고 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미국영주권을 포기했고 다음해부터 은둔준비를 하기 시작하여 지금의 대야농장 부지를 찾기까지 8년이란 세월이 걸렸던 것이다.

 

오늘날 내가 있기 까지 부산시민의 배려가 컸다고 생각하며 항상 감사한 마음을 간직하고 있다. 어려울 때마다 부산시민이 용기를 주었고 혹 오판이 생겼어도 선생이 실수하셨을 것이라며 깨우침이 부족했다고 생각하는 분은 없었다는 것이다. 그만큼 부산시민의 정신적 지주가 되려고 애쓴 보람이었지 않나 생각한다. 지금도 이곳 산골짜기까지 불원천리하고 나를 찾아주시는 분이 거의 부산지역 시민들임을 부인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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