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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미국이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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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7-03-18 16:19 조회1,59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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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설하고,

당시에 상담 받았던 고객이 지금까지 연결되고 있을 만큼 오랜 세월 소위 단골이 될 만큼 통쾌한 통변을 했던 것은 사실이다. 부산에서는 제산선생님이 계시므로 나의 통변이 그다지 신비롭게 생각되지 않겠지만 미국에서는 생전 처음으로 蘭明學의 통변을 들어보니 신기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과거지사야 그렇다 치고라도 머지않아 닥쳐오는 미래지사가 지금까지도 그다지 오차가 없다는 것이니 요즘에는 전화로 상담해주지 않는 관계로 부산까지 찾아오는 분들도 여럿이 있는 실정이니 한번 감명 받으면 평생 잊지 못하는 인연이 되는 법이다.

귀농후에도 대야농장까지 얼굴보고 싶다며 찾아온 분들도 있고, 김선배님은 내가 귀농할 때 같이 이곳에 와서 사시기도 했는데 이분의 감명실례를 추후 공개할 것이다.

 

미국교민사회에 난곡 차예산의 인지도는 날이 갈수록 높아졌다.

 

1987년 늦은 봄 시카고에서 나름대로 성공했다고 자부하는 분들이 많이 찾아왔던 것으로 생각된다. 교민사회에서도 개인간에 사채놀이나 재태크로 인한 투자가 활발했던 시기였는데, 시카고 중심가(다운타운)에서 보석상을 하는 이회장이란 분이 있었는데 한국 사람이 중심가 백화점에서 보석상을 하려면 상당한 신용을 쌓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아마도 마피아조직의 협조가 있어야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상당한 재력가로 정평이 나 있었다고 한다. 상담을 의뢰한 아즈마 하우스라는 이름으로 일본식 음식점을 운영하는 부인이었는데 돈이 모이는 데로 사채이자를 받고 이회장한테 빌려주고는 했는데 이율이 상당히 높다보니 있는 돈 없는 돈 몽땅 빌려주고 남의 돈까지 싼 이자로 얻어서 소위 이자놀이를 했던 것이다.

 

사주를 보니 그 부인이 현재 위험한 수렁에 빠져들고 있음을 지적해주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이회장이란 사람이 비싼 이자를 주고는 마구잡이로 이곳저곳에서 많은 자금을 끌어들여서 해외로 반출을 시켰던 것인데 이권이 많은 보석상을 하니까 아프리카에서 다이어몬드광에 투자도 하며 많은 보석을 대량 수입하느라 자금이 필요하다는 구실을 했던 것이다. 유혹의 미끼치고는 한 번에 노다지가 나올 수 있다는 생각을 하기에 부족이 없었던 것이다.

 

지금 사주를 기억하지 못해서 실감 있는 통변의 묘미를 보여주지 못하므로 소설 같은 이야기가 되지만 하여간 그 당시 시카고에 살던 교민이라면 보석상 이회장의 사기사건을 모르는 분은 없을 것이다. 아즈마하우스 여사장에게 한마디로 당신주머니에서 나간 돈은 한 푼도 회수를 못하게 된다고 하자 깜짝 놀랐을 것이다. 그동안 받은 이자는 있지만 가령 이자가 2만불 들어오면 거기에다 더 보태서 부풀려졌기 때문에 받은 이자도 주머니로 들어온게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이회장에게 건너간 현금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수백만 불에 이른다는 말을 들엇다. 동참했던 분들도 개별적으로 방문해서 알게되었다.

 

드디어 정신을 차리고 돈놀이하던 큰손들을 모두 불러 모아 대책회의를 하기에 이르렀으니 그만큼 나의 감명실력을 인정했다는 증거도 되는 것이다. 처음부터 바람을 일으킬 정도로 교민사회에서 나의 능력이 평가받을 때였기 때문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회장을 굳게 믿고 있다가는 사주보주며 기록해준 감명지를 가지고 숙고에 들어가 흥신소에 의뢰하여 실체를 파악하다보니 실로 이회장에게 자금을 회수하기 어렵다는 결론에 도달하자 이 회장은 더 이상 사기행각을 할 수 없는 처지에 임하자 보따리 싸들고 내외가 도망을 갔던 것이다.

 

도망간 뒤에 사실조사를 해보니 완전히 빈 털털이였다는 것이다. 구멍가게 하는 사람, 월급장이, 청소해서 한푼 두푼 모아놓은 재산 등 교민사회가 발칵 뒤집힐 정도로 수없는 사람들이 당했던 것이다. 이때 내가 아니었더라면 더 많은 피해자가 생길 수 있었을 것으로 예상되었던 것이다.

 

돈을 빌려준 사람들은 이회장의 비위를 잘못 건드리면 원금회수를 못할까봐서 전전긍긍하며 뒷조사만 하고 있었는데 이때 내가 일시 귀국하면서 그해 7월이면 이회장이 도망갈 것이니 그 안에 대책을 세우라고 일러주고 부산으로 들어왔는데 7월 중순경 부산까지 전화가 와서는 나를 빨리 시카고로 와 달라는 부탁을 하는 것이었다.

 

전화 받고 시카고에 간 것이 여름방학 때였으니 7월 하순경으로 짐작된다. 아니나 다를까 이회장이 자취를 감추는 바람에 당국에 고발하니 이미 출국했다고 하는 것이었다. 어디로 갔는지에 대해선 확실히 모르는 모양이었다.

 

내가 그 사람의 명조를 분석해보니 그 사주가 맞는다면 일본으로 갔을 것이라고 해서 탐정을 고용해서 일본으로 보내 이회장이란 사람은 찾았는데 자금은 회수를 못하고 사업하면서 모두 실패했다는 사실만 확인하는 것으로 사건이 종결됐던 일화다.

 

채권단에서는 나더러 다시 이회장의 자금을 어디다 숨겼는지 찾아주면 응분의 대가를 치러주겠다는 제의도 받았으나 더 이상 말려드는 것은 옳지 않다고 판단되어 유야무야 된 것이다. 사실 이회장의 재산이 서울 성북동 모처에 차명으로 부동산에 투자해서 숨겨졌다는 언질은 줬지만 회수는 불가했던 것이다.

 

이런 일이 있고나서는 시카고에 힘께나 주고 산다는 분들은 차예산선생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으니 미국생활이 편했던 것은 사실이다. 이로 인해 많은 분들을 만나게 되었고 지금까지도 나를 찾는 분이 있다.

 

박정희정권에서 실세라고 하던 분들이 전두환정권때 낙향하기에 이르자 많은 자금을 가지고 미국으로 이주한 분들이 상당히 많았다고 들었다. 보통 수백만 불씩 투자이민으로 온 분들도 있다는 소문이 파다했었다. 그래서 그런지 한국교민사회에 호화생활을 하는 분들이 상당수 있었다. 고급저택을 구입하고 보통 벤츠 600정도는 흔히 볼 수 있었다.

 

당시 한국에서는 벤츠600을 구경하기 어려웠지만 교민 중에는 세계최고급 승용차를 보유한 분들이 매우 많았으므로 이분들이 자기과시욕에 나에게도 자주 찾아오곤 했는데 고급차를 타고온 교민들은 대체로 5공 때 실세가 많았다고 한다.

 

미국에 있으면서 감명했던 분들의 이야기를 재미로 조금 소개해 볼 생각이다. 너무 오래된 일이어서 모두 기억에서 사라졌지만 생각나는데로만 회고는 해보는데 당시 감명하면서 감명지를 복사하여 많이 보관하고는 있으나 이는 강의할 때 연구자료로 활용할 뿐 전면 공개하기는 어렵다.

 

미네소타 살인범

이렇게 소문이 나기 시작하자 이웃도시에 거주하는 많은 유력인사들이 방문하기도 했고 어떤 경우는 거액의 출장비를 제시하며 방문해 달라는 부탁도 수 없이 받게 되었다. 지리에 어두우므로 쉽게 움직일 수 없었지만 통역 가이드 비용까지 부담해줄테니 꼭 만나기를 희망하기도 하여 미네소타 조지아 뉴욕 플로리다 로스앤젤리스 및 샌프란시스코까지 방문상담을 해주기도 했다.

 

그 중에 특이할 만한 감명내용을 소개한다.

소문을 들었다며 미네소타에 사는 1952년생이라며 자기가 오고 싶으나 집을 떠날 수 없는 처지에 있으니 꼭 방문해달라며 당시 3.000분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그다지 많은 금액은 아니지만 당시 한사람 보는데 50불 받던 시절이었으니 그래도 섭섭지는 않은 복채인지라 미국 구경도 하고 여행도 할 겸 이웃에 사는 교민을 동반하여 방문했던 일이 있었는데 이분은 경남 진주 사람으로 이민 와서 부부간에 식당을 하여 돈을 많이 벌었는데 부인이 외갓남자와 눈이 맞아 이혼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8세 된 딸이 하나 있는데 딸 양육권을 부인이 갖겠다고 주장하자 딸의 양육권을 빼앗기면 그 동안 벌어놓은 재산을 거의 처에게 줘야 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이혼을 할 수 없다며 자주 다투다가 그만 살인을 저지르게 되었던 사건이야기다.

자기는 돈 벌기 위해 죽기 살기로 일만 하다보니 이런 꼴을 당하게 되었는데 이혼하게 되면 그 동안 피땀흘려 벌어놓은 재산을 위자료와 양육비로 몽땅 빼앗기게 되자 집에서 폭행한 것이 그만 사망에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8살 난 딸이 엄마가 아빠에게 폭행당하는 것을 목격한 유일한 증인이었지만 아기의 증언이 채택되지 않으므로 아이가 12살 될 때까지 남편을 집에서 떠나지 못하게 하고 감금한 상태에서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시신은 집 주변 쓰레기장에서 찾았다고 했다.

 

사주를 보니 당신이 지금 자수하게 되면 12년형을 받을 것이며 인정하지 않고 체포될 경우 24년형을 받게 될 것인데 앞으로 2년이 경과하면 유죄를 인정받아 구속수감하게 될 것이라고 하니 그때가 딸이 10살이 되었을 때니 벌써 이런 생활이 2년이나 흘러갔다는 것이었다.

 

실로 변호사의 말로는 죄를 인정하면 12년형으로 감형 받을 수 있고, 인정하지 않으면 24년형을 받게 된다는 말을 들었다는데 내가 감명한 내용과 한 치도 틀리지 않으므로 자기 나름대로 계산을 해보니 감명이 정확하다고 느꼈던 것이다. 그래서 자수하기에 이르렀는데 딸은 어느 수녀에게 보호조치되었고 감옥에 들어가 12년 형을 받았다는 소식을 옥중에서 편지로 보내왔던 것이다. 나더러 평생의 은인으로 생각할 테니 면회라도 한번 와주시면 고맙겠다고 했으나 말도 안 통하고 길이 낯설어 면회를 가보지 못했던 일화다. 아마 그분이 출감해서 무단히 나를 찾았을 것으로 생각한다. 왜냐면 자기도 출옥하여 이런 신비한 학문이나 연구하며 진주 고향으로 와서 살겠다고 했기 때문인데 아마도 지금쯤 진주 어드메서 철학을 공부하였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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